홈으로 미술용어사전


라이트 아트(light art)

1960년대에 일어난 미술 운동. 빛의 효과를 극적으로 살려 새로운 시각적인 이미지를 창출 해 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작품의 총칭. 굳이 번역하면 빛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실 로 조형 미술은 시각 예술이라는 점에서 생각하면 모두 빛과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 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라이트 아트라고 부르는 것은 광선의 물리적 기능이라든지 광원 자 체의 효과를 주로 다룬 작품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라이트 아트를 파악하면, 그 경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양하다. 대체로 주요한 경향을 추려보면 ① 작품과 인간의 눈 상에 생기는 광학적인 효과를 노린것(소토, 바자렐리 등의 착가이나 착시 효과를 이용한 작품) ② 폰타나, 카마르고 등에 의해 추구되어온, 작품에 주어지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강조한 것 ③ 작품의 소재 자체에 의해 광선을 다루는 것(래리벨, 소브리노 등)광원을 즉물적으로 투사 하는 것 ④ 광원의 프로그래밍된 점멸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플래빈, 모를레 등) ⑤ 광원이 다른 이미지와 결합된 효과를 지닌 것(크리사, 안토나코스, 인디애너 등) ⑥ 광원에서 나오 는 빛을 여러 가지로 컨트롤하여 광상을 만드는 것(쥐리오 르 파르크가 대표적인 작가) ⑦ 빛의 환경을 만드는 것(보리아니) ⑧ 빛의 스펙트럼을 전개하여 빛의 영상을 보이는 것(쇠 페르) 등이 있다. 아무튼 라이트 아트는 빛을 장식적으로 보지 않고, 빛을 매체로하여 과학과 예술의 결합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는 미술운동이다. 또한 키네틱 아트, 팝 아트, 미니멀 아트,에 인접한 장르로서 한 시대를 만들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제2세대를 향하 고 있다. 오늘날의 작업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전반적인 이념이 나 양상은 복합적이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보다 단순하고 안정되고 알기 쉬운 것으 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대중적인 표현 형식을 특징으로 한다.

 

라템-생-마르탱 파

라템-생-마르탱을 기점으로하여 이루어진 화파. 1890년경부터 1914년까지 벨기에의 라템-생 -마르탱 지방에 미술가촌이 설립되자 50여명 가량되는 화가, 조각가, 음악가, 그리고 시인들 이 번갈아가며 이곳을 방문했다. 바르비종이나 퐁타방, 그리고 보르프스베데 등에 있는 미술 가촌의 회원들처럼 그들은 이미 상실한 생활과 자연의 통일을 재발견하기를 희망했다. 라템 -생-마르탱 파 화가들의 두변째 그룹은 1914년 경에 형성되었는데 전자와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었다. 이 그룹은 인상주의의 양식으로 돌아가 도식적인 선을 희생시키고 색깔을 강조하 면서 농촌 생활의 풍경을 그렸다. 플랑드르 표현주의의 창시자들은 모두가 이 그룹들의 회 원들이었다. 라템-생- 마르탱 미술가촌은 1914년의 선전포고에 뒤따라 해체되었지만 그곳에 서 시작된 미술 운동은 그 후에도 벨기에 미술의 발전에 광법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라파엘로 Sanzio di Urbino Raffaello (1483-1520/이탈리아)

이탈리아 화가, 르네상스 전성기 3대 화가 중의 한 사람이며, 1483년 울비노에서 태어났다. 1500년 페르시아에 가서 페루지노 밑에서 공부하고 그 곳 캄비오 벽화 조수로 일하다가 1504-1508년 피렌체에서 '대도의 마돈나', '한가한 마돈나' 등과 같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 전주의 양식을 확립했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청으로 바티칸 궁전의 '서명의 방', '아테네 학원' 등의 걸작 을 완성하였다. 교황 레오 10세 밑에서도 성당 벽화, 성모자, 성모상 을 제작했으며, 1514년 건축가 브라만 테가 죽은 뒤에 로마 성 베드로 성당 조경의 지휘를 계승하고 '치기 예배당'을 설계했다. 르네상스기에 있어서 고전주의 예술적 대표적 존재의 한 사람이다. 라파엘로 (Raffaello Sanzio,1483~1520)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시인이며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다 페루지노의 제자가 되었다. 1504년 피렌체로 가서 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 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피렌체파 화풍으로 발전시켰다. 1509년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하여 바티칸 궁전의 천장화를 그린 것을 비롯하여 많은 벽화를 그렸다. 한편, 건축에도 손을 대어 성베드로 대성당·바티칸 궁전·키지 예배당·빌라마다마 등의 건물을 짓고 장식하는 일을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와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예술가의 하나 로 꼽힌다. 주요 작품으로는〈성 미카엘〉 〈성 게오르기우스〉 〈레오10세 상〉 등이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Russian Avantgarde)

1911년에 있었던 모스크바의 유명한 전시회 '카로 부베(Karo- Bube)를 통해 아리스타크 렌 툴로프, 미하일 라리오노프, 카시미르 말레비치, 나탈리아 곤차로바, 그리고 부룰류크 형제는 러시아 회화에서 '비대상성'의 경향을 주로 시도했다. 그와 동시에 이 전시회는 러시아 아방 가르드 운동의 모범적인 출발이되었다. 예술의 발달사에서 러시아 회화와 조형의 출현은 러 시아 아방가르드의 특징으로 인해 서구의 추상화 운동으로 이해된다. 즉 그것은 전통적인 관습에서 국제적이며 근대적인 경향으로의 근본적인 전이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전이 과정은 그 혁명적 정신에 있어서 10월 혁명이라는 정치적 사건과 함꼐 진전되었고 무엇보다 도 1917년에서 1921년에 걸친 공산주의 혁명기간 동안 볼셰비키의 문화 정책에 의해 강력하 게 추진되었다. 구성파의 여러 조류들, 이를테면 절대주의 회화의 말레비치, 광선주의의 라리오노프, 기계 미술의 타틀린과 로드첸코, 그리고 부를류크 형제, 안트완 페브스너와 나움가보의 광선 키네 틱, 마야코브스키의 시 등은 모두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계열에 속한다. 추상파 예술가들은 볼셰비키의 새로운 통치 체제를 아방가르드 예술의 개척자라고 찬미했고 평론가이자 정치가 였던 루나르스키의 지도하에서 그 당시까지 러시아에서는 결코 겪어보지 못했던 가능성-역 사나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다는-을 공적인 교육제 도와 무수히 신설된 박물관과 화랑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예술가들이 각각 모 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상급학교의 요직을 차지하게 도면서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점차 분열되 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추상주의'와 '구성주의'로 간단히 표현될 수 있는 두가지의 예술적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추상주의자인 말레비치, 칸딘스키, 그리고 페브스너 향제 등은 에 술을 추상적 형식의 구조적 명확성을 통해 질서있는 세계관의 형상을 제시하는 정신활동으 로 간주했다. 반면에 구성주의자, 타틀린과 로드첸코는 프롤레타리아의 발전을 위해 예술과 기술의 효용성을 상호 결합시키려고 했다. 1920년, 즉 혁명 후의 모더니즘적인 예술과 예술정책은 레닌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공식적인 작업의 기회를 얻기 힘들게 되었다. 루나차르스키의 죽음으로 인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종 말 또한 확실해졌고 이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선동적 특징을 지닌 중앙 통제적인 선 동 예술이 생겨났다.

 

런던 그룹(London Group)

1913년 영국에서 형성된 미술그룹. 캠튼타운 그룹의 주도하에 1908년 알버트홀에서 루터 (Frank Rutter)가 조직하였던 예술가 연맹. 전시회에 출품한 여러 작가들과 작은 여러 그룹 들이 모여 결성되었다. 이 그룹의 목적은 모든 학파의 전위작가들에게 전시회의 기회를 제 공해 주는 것이었다. 이 그룸의 형성은 한편으로는 로열 아카데미의 보수주의에 대한 항의 였고, 또 한편으로는 신영국 미술협회에 대한 항의였다. 이 샔문에 그 독자적인 성격이 강조 되었으며 전 영국을 커버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었다. 초대 회장은 시커트회 회원이었던 길 만(Harold Gilman)이었다. 첫변째 전시회는 1913년 브라이튼에서 있었고, 1914년 구필 화랑 에서 첫번째 런던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기계적인 작품선정이나 심사위원회 선출은 없었으 며 회훤으로는 네빈슨(Nevinson), 워즈워스(Wodsworth), 존 앤드 폴 내슈(John &Paul Nash) 조각가인 질(Gill), 웹스타인 등이 있다.

 

레디 메이드 ready-made(영)

마르셀 뒤샹이 창조해낸 미적 계념. 일찍이 입체파* 시대에 뒤샹이 도기로 된 변기에 <레 디 메이드> 라는 제목을 붙여 전람회에 출품함으로써 이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앙드레 브르 통은 레디 메이드를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예술작품의 지위에까지 높여진 기성품"이라고 정의했다. 뒤샹에 의하면 레디 메이드, 즉 기성품을 그 일상적인 환경과 장소에서 다른 곳 으로 옮겨 놓으면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게 되고 드디어는 단순히 사물 그 자체의 무의미 함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브라크나 피카소, 또는 초현실주의*의 작가들이 바닷가의 돌조각이나 짐승의 뼈등을 주워 오브제*로 한 방법과 상통하는 것으로미(美)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나타내는 것이었 다. 즉 미는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근대미술의 새로운 주장이요 특색이다. 그래서 어디서나 손 에 넣을 수 있는 레디 메이드를 창의를 가지고 발견하면 창작된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념은 전후 서구 미술, 트히 팝 아트* 계열의 작가들과 신사실주의* 및 개념미술* 의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 1913.앗상블라주 전체높이:128.3

 

레디 메이드(ready made)

마르셀 뒤샹이 창조해낸 미적 개념. 일찍이 입체파 시대에 뒤샹이 도기로 된 변기에 <레디 메이드>라는 제목을 붙여 전람회에 출품함으로써 이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레디 메이드를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예술작품의 지위까지 높여진 기성품"이라고 정의했 다. 뒤샹에 의하면 레디 메이드, 즉 기성품을 그 일상적인 환경과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 겨 놓으면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게 되고 드디어는 단순히 사물 그 자체의 무의미함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브라크나 피카소, 또는 초현실주의의 작가들이 바닷가의 돌조각 이나 짐승의 뼈 등을 주워 오브제로 한 방법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즉 미는 발견해야 한다 는 것이 근대 미술의 새로운 주장이요 특색이다. 그래서 어디서나 손에 넣을 수 있는 레디 메이드를 창의를 가지고 발견하면 창작된륚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전후 서구 미술, 특히 팝 아트 계열의 작가들과 신사실주의 및 개념미술의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 향을 끼쳤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1452~1519)

이탈리아의 미술가. 과학자·기술자·사상가로도 알려져 있다.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태어났다. 14세 무렵 피렌체를 떠나 베로키오의 제자가 되었으며, 20세 때 피렌체의 화가 조합에 가입 하였다. 1476년 스승인 베로키오와 함께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에서그는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 보다 잘 그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뒤 밀라노로가서 17년 동안 살며 〈암굴의 성모〉 〈최후의 만찬〉 등을 그린 뒤, 다시 피렌체로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고,과학 연구도 활발히 하여 새가 나는 방 법,지질학·식물학·입체 기하학 등을 연구하였다. 1516년에는 프랑스로 가서 궁정 화가로서 활동하면서 〈성 안나〉와 〈모나리자〉를 완성하 는 한편, 각 방면에 걸친 연구를수기로 정리하면서, 운하·궁정 설계 등을지휘하였다. 그는 15세기에 완성된 사실주의를 뛰어넘어 16세기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완성하였는데,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였고,특히 선을 아름답게 그렸다.

 

레이아웃(lay- out)

디자인, 광고, 편집에 있어서 문자, 그림, 기호, 사진 등의 각 구성요소를 단지 바르게 배치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기본 조건인 주목성, 가독성, 명쾌성, 조형성, 창조성 등을 충분 히 고려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종합적인 구성력과 조합 능력도 요구 된다. 조합에 있어서는 각 구성요소의 독자적인 역할과 동시에 전체로서의 통일된 질서감각 이 있는 레이아웃, 또 목적에 알맞은 것이 될 수 있도록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하는 것이 중 요하다.

 

레이요그램(rayogram)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감광 재료 위에 물체를 직접 얹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명암을 이 용한 추상사진. 포토그램, 리히트그라픽과 같은 것으로, 파리에 있던 미국의 초현실주의자인 만 레이가 1923년<블룸>이라는 잡지 4월호 표지에 발표하면서 붙인 명칭이다. 뒤에 그는 자신의 작품집에서 레이요그래프라고 고쳐 불렀다. 그는 1921년에 자비출판의 한정판으로 레이요그램 작품을 트리스탄 차라의 시와 함꼐 발표했다.

 

레이저 아트(Laser Art)

레이저는 유도방출에 의한 광증폭, 즉 '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 의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응퇐짞력있는 고강도의 광쳾건이나 빛을 발산하는 기 구인 레이저는 예술가나 공예가들이 디자인, 동판화, 조각 등의 분야에서 사용하는 새로운 도구이다. 레이저는 비취나 플라스틱을 조각하는데 이용된다. 헬륨과 네온 레이저는 시청각 기관과 결합하여 키네틱 아트의 제작에 이용되어왔다. 레이저 홀로그래피는 원형의 제시가 불가능한 삼차원 조각의 경우에도 삼차원 형태의 제시를 가능하게 한다.

 

레제

Fernand Leger (1881-1955/프랑스) 1881년 프랑스 서북부 지방에 위치한 아르장탕 출생의 화가. 16세 때인 1897년부터 4년간 브르타뉴의 칸에서 건축 기사의 수련생으로 있다가 1900년 파 리로 나와 1903년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고전파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제롬의 가르침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루브르 미술관 및 아카데미 줄리앙에도 다녔다. 그의 화풍은 인상파로부터 출발하였으나 1905년부터 1907년 사이에 걸쳐서는 포비즘의 화가 특히 마티스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1907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서는 세잔의 영향으로 화면 의 조립 및 새로운 공간 표현에 마음이 끌렸으나 1911년경부터 퀴비즘 운동에 참가하 였다. 그리하여 초기의 제작 방법을 버리고 퀴비즘의 기하학적 체계에 적응하면서 이에 역 동감을 부여하는 다이내믹한 퀴비즘의 방향을 개척해 나갔다. 이러한 추구는 제1차 세계 대 전에 종군함으로써 한 때 중단 되었으나 전후 1925년까지 레제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확립되었다. 현대적인 기계 장치의 명석한 기하학적 형태 - 그는 피카소, 브라크 등이 시도한 물체의 기 하학적인 면의 환원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포름의 해체를 시도하면서 최후까지 완전히 포름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를 반영하는 화면 공간에 메카니칼한 인간상 및 정물을 배합하 여 밝고 선명한 색조로 그려 있는데, 특히 다이내믹한 형태에 있어서는 미래주의의 영향이 엿보이고 있으며 종래의 자연주의에서는 볼 수 없는 추상적인 인공미의 세계가 펼쳐져 있 다. 1920년에는 르 코르뷔제를 만났으며 1921년에는 스웨덴 발레단의 무대 장치를 담당하였던 바 그후에도 이 분야의 일에 종종 손을 대었었다. 1923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서는 전위 영 화 [발레 메카틱]에 협력한 뒤 1924년에는 이탈리아(라벤나 및 베네치아)로 여행하여 특히 고대의 벽화 및 모자이크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 영향으로서 인체의 기초적인 성격을 굵은 선으로 크게 나타내는 작풍으로 전환하였다. 193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의 생활 및 건축으로부터 자극을 받았고 이어서 1933년 에는 그리스로 여행하였다. 1938년 재차 미국으로 여행하여 건축 장식에 종사하다가 일단 귀국, 제2차 대전이 일어난 후인 1941년부터 종전되는 해까지 미국에 체재하면서 즐겨 예술인 및 자전거 타기 등을 그 렸다. 1945년 12월 파리로 돌아와 이듬해에는 앗시의 교회당 정면의 모자이크를 제작하였고 1949년에는 파리의 근대 미술관에서 대회고전을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51년에는 사회 적 테마의 '건축 노동자'등을 그려 독자적인 늠름하고 명확한 조형을 한 층 더 밀고 나갔다. 1955년 8월 파리 교외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주요작품으로 '세여인', '도시' 등이 있다. 1881년2월 4일 1897년 (16세) 1900년 (19세) 1902년 (21세) 1903년 (22세) 1907년 (26세) 1908년 (27세) 1910년 (29세) 1911년 (30세) 1913년 (32세) 1916년 (35세) 1917년 (36세) 1919년 (38세) 1921년 (40세) 1922년 (41세) 1923년 (42세) 1924년 (43세) 1925년 (44세) 1928년 (47세) 1930년 (49세) 1931년 (50세) 1932년 (51세) 1933년 (52세) 1934년 (53세) 1935년 (54세) 1936년 (55세) 1937년 (56세) 1940년 (59세) 1941년 (60세) 1944년 (63세) 1945년 (64세) 1946년 (65세) 1948년 (67세) 1949년 (68세) 1950년 (69세) 1951년 (70세) 1952년 (71세) 1953년 (72세) 1955년 (74세) 노르망디의 아르장탕에서 태어남. 칸의 건축가 밑에서 견습공으로 일함. 파리로 나와 건축가 밑에서 제도공으로 일함. 베르사이유의 공병 연대에서 병역 복무. 장식 미술학교에 입학. 국립 미술학교의 입학 시험에는 실패하지만 청강생으로 강의를 들으 며 아카데미 쥘리앙에도 다님. 1905년까지 생활을 위해 건축가, 이어서 사진가 밑에서 일했으며, 어린 친구인 화가 마르와 공동 생활을 함. 살롱 도톤에서 세잔 회고전을 보고 깊은 영향을 받는다. 몽파르나스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사는 '꿀벌의 집'에서 살면서, 화가와 문학자 들로네, 샤갈, 수틴, 아르키펜코, 로랑스, 리프시츠, 자콥, 르베르디, 레이날, 상드라크, 아폴리네르 등과 교 우를 맺는다. 칸바일라의 주목을 받아 그롤 통해서 피카소와 브라크가 하는 일을 알게 된다. 랑샨 코메디 가로 옮겨서 [지붕]의 연작에 착수한다. 들로네, 글레즈, 피카비아 등과 뒤에 [섹숑도레] 그루우프가 되는 비용 가의 모임에 참가하 다. 앙데팡당전에 [숲속의 나체]를 출품. [섹숑 도르] 제1회전에 참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그림 . 노트르담 드 샹 가에 아틀리에 차림. 칸바일러와 계약. [형제 콘트라스트]를 그림. 베를린에 서 전람회를 보고 5월에 아카데미 바시리에브에서 [회화의 근원과 그 표현의 가치]에 관한 강연을 한다. 휴가 중 파리에서 아폴리네르에 이끌려 채플린 영화를 보러감. 9월에 베르덩 전선에서 독가 스를 마시고 넘어짐. 빌팡트에서 입원. 연말에 퇴역. [트럼프 놀이]를 제작. 상드라르의 [노트르담의 천사가 영화하된 세계의 종말]으 삽화를 제작. 12월 2일, 잔 로이와 결혼함. 말로의 [종이 달]의 삽화를 제작함. 어머니가 사망하고 리졸의 농원을 상속받아, 이후 자주 그곳에 머물며, 스웨덴의 발레[스케 이팅 링크]의 믹, 장치, 의상을 담당하였다. 민요 작곡, 상드라르 각보의 [천지 창조]를 위한 장치와 의상을 담당함. 레르비에의 영화 [비정의 여인] 제작에 협력. 오장팡과 함께 [현대 예술 아카데미]를 창립. 영화 [발레 메카닉]을 제작. 파리의 국제 장식 미술전에서 프랑스 관의 전시실 장식을 들로네와 함께 제작하였고, 또 르 코르뷔제가 설계한 [에스프리 누보 관]을 위해 최초의 벽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베를린의 프레히트하임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 기회에 그곳에서 르 코르뷔제를 위한 강연 [악튜얼리테]를 행함. 카르다를 만남. [열쇠와 모나리자]를 그림. 9-12월, 처음으로 미국 여행. 그랑드 쇼미에르 아틀리에에서 가르침. 스웨덴과 노르웨이로 여행. 쮜리히의 쿵스트하우스에서 개인전을 갖고, 이 기회에 그 곳을 방문. 현대 건축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르 코르뷔제롸 함께 그리스로 여행, 돌아오는 도중 여객선에서 [생활에 직면 한 건축]이라는 연제로 강연. 여름에 앙티브에 머무른 후에 런던으로 가서, 콜더의 영화 [다가올 것의 형태]의 미술을 담 당. 9월에 스톡홀름에서 개인전을 갖고, 이를 계기로 그곳에 여행. 브뤼셀 만국 박람회의 체육관을 장식. 르 코르뷔제와 함께 미국으로 여행. 뉴욕과 시카고에 서 개인전. 아라공, 르 코르뷔제와 [레알리즘 논쟁]을 함. 리파르의 발레 [다비데의 개선]의 장치. 파리 만국 박람회의 발명관을 위한 벽화 [동력 수 송]을 제작함. CGT(노동 총동맹)의 제전을 위한 미술을 담당함. 앤트워어프에서 [계의 색깔]에 관해서 강연. 헬싱키에서 개인전. 도이칠란드의 군의 침입을 피해서 10월에 미국으로 망명. 예일 대학교 교수가 됨. 체미 중에 다채로운 창작을 함. 캘리포니아의 밀즈 칼리지에서도 가르침. 뉴욕의 마티스 화랑에서 망명해 온 예술가들, 마 송, 탕기, 브르통, 자킹, 몬드리안, 오장팡 등을 만남. 리히터의 영화 [돈으로 사는 꿈]에 코르다, 뒤샹, 망 레이 등과 함께 협력, [인공 심장의 아 가씨]편을 담당함. 12월에 프랑스로 귀국. 아시이 교회의 피사드 모자이크 장식을 위촉받음. 보챠드의 영화 [미국의 레제]에 해설을 붙 임. 루이 칼레 화랑에서 체미 중에 그린 작품을 전시. 발레 [강철의 발걸음]의 장치를 함. 브뤼셀에서 바젠과 함께 대화 형식의 강연 [오늘날의 예 술]. 국제 부인 회의을 위한 벽면의 장식을 함. 석판화집 [서커스]를 출판. 랭보의 [일뤼우미나시옹]의 삽화와 미요의 오페라 [보리봐르]의 장치와 의상을 맡음. 비오의 지난날의 제자 부리스가 있는 곳에서 처음으로 도기를 제작함. 아내 쟌 사망. 비오에 도예의 아틀리에를 마련. 벨기에의 바스트뉴에 있는 미국 기념관을 위 함 모자이크 제작. 오당쿠르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 밀라노 트리에날레 전을 계기로 이탈리아에 여행. 제자인 나디아 코드스비치와 결혼. 지프 쉬를 이베트에 가옥 [대보리수 장]을 삼. 뉴욕에 있 는 유엔 본부의 큰 호울의 벽화를 제작. 레오나르도다빈치 탄생 500년 제를 기념하여 앙 브라와즈에서 상연된 J.샤라의 발레의 장치 와 의상을 담당.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위한 삽화 제작. 상파울로의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음. 프랑스 가스 회사를 위한 조각, 도기, 모자이크를 제 작. 프라하의 소코르 회의를 계기로 체코슬로바키아에 여행. 8월 17일 지프쉬르 이베트에서 사망.

 

레제(Fernand Leger)-(1881~1955)

인체를 기계적 형태로 변형, 산업 사회의 인간상을 표현하였으며, 노동자들을 주된 소재로 하였다. 1881년 프랑스 서북부 지방에 위치한 아르장탕 출생의 화가이다. 16세 때인 1897년부터 4년간 브르타뉴의 칸에서 건축 기사의 수련생으로 있다가 1900년 파 리로 나와 1903년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고전파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제롬의 가르침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루브르 미술관 및 아카데미 줄리앙에도 다녔다. 그의 화풍은 인상파로부터 출발하였으나 1905년부터1907년사이에 걸쳐서는 포비즘의 화가 특히 마티스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1907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서는 세잔의 영향으로 화면의 조립 및 새로운 공간 표현에 마음이 끌렸으나 1911년경부터 큐비즘 운동에 참가하였 다. 그리하여 초기의 제작 방법을 버리고 큐비즘의 기하학적 체계에 적응하면서 이에 역동 감을 부여하는 다이내믹한 큐비즘의 방향을 개척해 나갔다. 이러한 추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종군함으로써 한 때 중단되었으나 전후 1925년까지 레제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확립되었다. 현대적인 기계 장치의 명석한 기하학적 형태 -그는 피카소, 브라크 등이 시도한 물체의 기 하학적인 면의 환원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포름의 해체를 시도하면서 최후까지 완전히 포름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를 반영하는 화면 공간에 메카니칼한 인간상 및 정물을 배합하 여 밝고 선명한 색조로 그려 있는데, 특히 다이내믹한 형태에 있어서는 미래주의의 영향이 엿보이고 있으며 종래의 자연주의에서는 볼 수 없는 추상적인 인공미의 세계가 펼쳐져 있 다. 1920년에는 르 코르뷔제를 만났으며 1921년에는 스웨덴 발레단의 무대 장치를 담당하였던 바그후에도 이 분야의 일에 종종 손을 대었었다. 1923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서는 전위 영화 [발레메카틱]에 협력한다. 1924년에는 이탈리아 (라벤나 및베네치아) 로 여행하여 특히 고대의 벽화 및 모자이크의 아 름다움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 영향으로서 인체의 기초적인 성격을 굵은 선으로 크게 나타 내는 작품으로 전환하였다. 193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의 생활 및 건축으로부터 자극을 받았고 이어서 1933년 에는그리스로 여행하였다. 1938년 재차 미국으로 여행하여 건축 장식에 종사하다가 일단 귀국, 제2차 대전이 일어난 후인 1941년부터 종전되는 해까지 미국에서 예술인 및 자전거 타기 등을 그렸다. 1945년12월 파리로 돌아와 이듬 해에는 교회당 정면의 모자이크를 제작하였고 1949년에는 파리의 근대 미술관에서 대회고전을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51년에는 사회적 테마의 '건축 노동자'등을 그려 독자적인 늠름하고 명확한 조형을 한 층 더 밀고 나갔다. 1955년 8월 파리교외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작품 : 세여인, 도시, 건축공사하는 사람들, 형태의 구성 등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

네덜란드의 화가. 레이덴에서 태어났다. 14세때 암스테르담에 가서 라스트만에게 그림을배운 뒤, 1624년 레이덴으로 돌아와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1632년 〈툴프 박사의 해부〉를 그려 초상화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642년부터 〈야경〉을 비롯하여유화·수채화·동판화·데생 등,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기 면서 그의 예술은 활짝 꽃피기 시작하였다. 만년에는 가난으로 허덕였지만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만은 여전하였다. 그는 빛을 이용한 독특한 효과를 작품마다 담았는데, 그 때문에 그를 흔히 ‘빛의화가’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300여 점에이르는 동판화를 남겼는데, 동판화 기술은그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화상을 100여 점이나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며,에칭의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 키고 기술을 완성하여 유럽 회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성가족〉 〈야곱의 축복〉 〈유대 인의 신〉 〈직조 업자 조합〉등이 있다.

 

로드코(Mark Rothko)-(1903~1970)

몇 개의 매우 단순한 형태에 변화를 주어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채색된 공간에 매달린 색채의 장방형, 빈공간을 둘러싼 형태들, 솟아오른 색면 뒤에 드리운 검은 장막 등이 다. 러시아출신의 미국화가.1913년 미국으로 이민간 그는 예일대에서 과학공부를 한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표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고 1940년대에 수중생물계를 현미경으로 들 여다 본 것 과 같은 유기적 형태를 띤 그림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한다. 1947년부터 로드코의 그림에서는 모든 유기체적인 유사성이 사라지고, '다양한 형태'의 색 면만 남게 된다. 그의 채색 법은 지극히 세밀하여 캔버스에 채색을 했다기 보다는 염색을 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한다. 1950년대에는 불완전한 사각형과 빛나는 색채로 채워진 벽화크기의 작품들을 발표한다. 두 개의 커다란 직사각형이 정면으로 병치되어 있는 그의 이미지는 '모든 것을 포함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그려진 것이다. 이 사각형의 테두리는 불분명하게 지워져 서로 섞여 들어가며 색채는 완전히 기화되어 백열빛을 발하는 듯이 보인다. 1967-1969년에는 교회내부화를 그린다. 8각형의 실내를 둘러싸는 14점의 작품은 색채가 보 이는 미묘한 변조에 의해 관객으로 하여금 형이상학적인 관조의 경지에 빠지게 한다. 이 시기부터 그의 색채는 점점 어두워져 회색과 밤색이 주조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는 그를 자살로 이끈 신경성 우울증과 보여주는 것이기로 했다. 로드코의 추상적 공간들은 영혼의 집과도 같아서 그곳에서는 창문을 통해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으며 모든 출구를 닫혀있고 나가는 길은 서성거리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우상처럼 거대하고 극복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무엇으로 차단될 것 같이 보인다.

 

로랑생 (Marie Laurencin,1883~1956)

프랑스의 여류 화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윙바르의 회화 연구소에서 소묘를 배웠으며,처음에는 로트레크와 마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브라크와 피카소 등과도 알게 되고, 아폴리네르와 살몽 등의 시인들과도 접하였으나 본질적 으로 입체파 화가는 되지 못하고, 감각적이며 유연하고 독특한 화풍을만들어 냈다. 1912년의 첫 개인전에서 인정을 받아 파리 화단에서의 지위를 굳히고,1920년 로마의 개인전 에서도 인정을 받는 등성공하였다. 그 뒤로는 화단의 인기 작가의한 사람으로서 활동하였다. 흑인 예술이나페르시아의 세밀화에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유연한 소묘법과 담홍·담청·회백 색의 유려하고 감미로운 색채 배합이 특징이다. 주요작품으로는 〈승마 부인〉 〈두 소녀〉 등이있다.

 

로마네스크 미술(Romanesque Art)

10세기 말에서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에 걸쳐 고딕 예술에 앞서 중세 유럽 전역에 발달했던 미술양식.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은 로마네스크 건축이 로마 건축에서 파상한 것이 라는 뜻에서 프랑스 어로 '로망'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당시의 예술 양식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먼저 시기적으로 제일 앞선 것을 제1 로마네스크라고 한다. 제1 로마네스크란 원래 롬바르드 지방의 건축 양식을 일컫는 것 으로서 9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하여 유럽 서남부의 여러 지역을 거쳐 독일의 라인 강 과 프랑스의 로느 강 유역에서 완성된 건축 양식이다. 오토만 황제 치하의 독일 예술과 함 꼐 이 제1 로마네스크 형식과 10세기말∼11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발달한 예술을 합해서 때 로는 초기 로마네스크라고 부른다. 로마네스크 예술가들은 로마·비잔틴 및 이교도의 예술 과 카롤링 왕조의 예술에서 주제와 특성을 받아들여 상당한 지역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새로 통합된 세계적인 양식을 융합해냈다. 10세기와 11세기에 수도회가 창시되어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면서 예배를 위한 새 건 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아혀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 인 세계관을 표현하려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내려는 욕구가 로마네스크 양식을 낳게 하였다. 표현주의적 왜곡과 양식화를 보여주는 로마네스크 구상예술에서는 자연주의와 고전 예술 또는 고딕 예술이 갖는 인간적인 온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건축 ; 로마네스크 건축은 독일과 프랑스의 후기 카롤링 왕조의 전통과 함꼐, 로마의 궁륭 전통을 본존하고 있는 롬바르드 제1 로마네스크 건축이 만난 결과 생겨나게 되었다. 건축의 특색은 11세기 초기까지 목조로 덮었던 바실리카 식 설계로 된 네이브의 천장을 석조 궁륭 으로 바꾼 점이다. 한편 화재에 강하고 건물 수명도 영구적이며 내부의 웅장함과 탈월한 음 향 효과를 얻기 위해 돌로 궁륭을 만들었으며 돌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거대한 돌벽을 쌓 는 한편 측랑위에 계랑을 세워 이를 보강했다. 벽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창문의 크기 는 작게 했다. 비종교적인 로마네스크 건물 가운데 중요한 것은 성과 성채이며 가장 훌륭하 고 완전한 것은 영국의 런던탑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을 종합해보면 벽면은 크고 창문이 작 으며 중량감이 있다. 외관은 토스카나 파 등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며 내 부는 열주나 아케이드 등의 건축적 효과가 어두운 공간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로 마네스크 양식은 지역적 변형을 겪으며 서쪽으로는 포르투갈, 동쪽으로는 십자군에 의해 예 루살렘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핀란드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조각 ; 로마네스크 건축의 성장과 더불어 6백년 동안 거의 정지상태에 있던 조각이 크게 융 성하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돌로 된 릴리프로서 건축물에 종속되어 교회 건물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건축물에 종속되 조각이기는 하지만 주두를 보면 두 개의 아치로 집약된 벽면 을 기둥으로 유도하는 이 부분이 시각적으로 약점이 되기 때문에 이것에 조각을 장식하여 형태적으로 균형을 잡고, 동시에 네이브 좌우에 죽 늘어선 주두에 여러 가지 종교적 도상을 표현하여 신도들을 표교하는 효과까지 거두었다. 로마네스크 조각은 고전적 조형 전통과 이 방 민족의 기하학적 장식의 영향을 받아 발달했으며, 프랑스 북부와 영구에서는 이방 민족 의 전통이 지배적이었고 로마 조각이 유물로 많이 남아 있는 프로방스 지방과 이탈리아 일 부에서는 고전적 전통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독일의 로마네스크 조각가들은 특히 금속 조 각에 뛰어났으며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도 훌륭한 조각 작품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한편 영 국의 여러 지방에도 로마네스크 조각들이 많으나 대륙의 것들에 비해 열등하다. 건축 조각 이외의 것에는 금속 고예와 상아공예 및 성당 건물을 장식한 기념적인 조각 등을 들 수 있 다. 회화 ; 로마네스크의 프레스코 및 템페라는 카롤링과 오토만 전통을 직접적으로 따르고 있 다. 비잔틴의 영향이 강했던 이탈리아에서는 그것이 르네상스 회화로 이어지는 한편 북유럽 에서는 고딕으로 발전했다. 로마네스크 회화는 전반적으로 평면적이고 직선적이며, 중량감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 또한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어 성경 속의 장면이나 성자들의 생애를 지 극히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그리는 한편 관계없는 부분은 철저히 배경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림 속의 인물들의 옷무늬가 화려한 것과 그림틀의 장식을 보면 로마네스크 양식이 장식을 무척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미술

기원전 6세기말까지 에투루리아의 지배권 아래에 있던 도시국가 로마는 이 후 주 변 국가를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기원전 4세기경에는 에투루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게 된다. 계속해서 로마는 그리스와의 전쟁과 포에니 1, 2차 전쟁을 통하여 그리스 전지역을 장악하 게 된다. 그리스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포획한 전리품으로 들여온 희랍 도시국가들의 예술품에 매료된 로마인들은 그들 민족의 고유한 미의식과 위대한 그리스 미술을 통합시켜 새로운 로마 미술 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법, 정치, 전쟁술 등의 실 제적인 분야에 발달한 로마는 예술에 있어서는 철저한 그리스 모 방 주의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현실적 실용주의를 그리스에서 물려받은 예 술 유산 속에 접목시켜 이른바 '실증주의'라는 양식을 탄생시켰는데, 이는 실제 존재했던 인 물의 정확한 사실적 묘사와 웅장한 건축물들에서 찾아 볼 수있다. 로마 예술은 회화 부분에서는 프레스코화를 개발, 입체감과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벽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조각에서는 처음에는 그리스 때의 것을 그대로 보전, 답습하는 형식으로 나아갔으나, 로마인 특유의 개성 인 실증주의가 합류해 귀족이나 황제 등의 실제 인물의 사실적 묘사로 그리스 조각과는 또다른 작품이 제작되었다. 로마의 건축은 그 나라의 거대한 규모에 맞추어 크게 발전했는데,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도로 와 수로, 큰 경기장, 각종 기념물과 개선물등이 로마제국의 번창과 함께 수없이 제작되었으 며, 이것으로서 로마의 건축술은 그 후대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술적 업적을 이루었 다.

 

로스트 스컬프처(lost sculpture)

'보이지 않는 조각'이라고도 한다. '잃어버린'이라는 말은 '발견된'이라는 말에 대응하는 의 미로 사용된 것이다. 막스 코즐로프(Mrx Kozloff)를 위시한 사람들이 도날드 쥬드, 칼 안드 레 및 로버트 모리스의 미니멀 아트에 붙인 이름이다. 그들의 조각은 거의 시각적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 자칫 사실적이고 특징없는 일상용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71년 아른헴에서 '손스빅(Sonsbeek) 3주기전'에 전시되었던 안드레의 작품 중 하나는 공원 관리인이 쓰레기 로 잘못 알고 치워버렸다. 1967년 뉴욕에서 개최된 '횐경 속의 조각'이라는 전시회에서 클래 스 올덴버그는 <평온한 도시의 기념비>라는 보이지 않는 조각을 창작했다. 그것은 무덤파 는 사람이 사방 1.8m, 깊이 1m의 참호를 판후 다시 메우는 행위였다. 매장된 입방체와 유사 한 작품에 안드레에 위해 제시되기도 했다.

 

로코코 미술(Rococo Art)

미술사에서 루이 15세(재위 1715∼1774)시대의 특징적인 장식예술 및 장식품들을 일컫는 용 어. 로코코는 1700년경 프랑스에서 등장하여 18세기 말 복고풍에 밀려 후퇴할 때까지 유럽 을 휩쓸었다. 로코코라는 말은 `조약돌'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로카이유(rocaille)'에서 파생 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단어는 루이 15세 치하의 상류 사회의 취향을 지칭하는 미술사가 들의 은어이다. 처음에는 조롱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나 요즈음에는 미술사가들에 의해 객관적인 의미에서 일정한 통일과 조화를 갖고 있는 예술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을 일컫는데 사용된다. 부서지기 쉬운 호화로운 장식, 사소한 주제, 목가적인 시, 규모는 작으나 정밀한 조각 등이 쉽게 눈에 띄는 것이 로코코의 특징이다. 로코코는 바로크 미술이 즐겨 쓰던 부 정형이나 유동적인 조형요소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바로크의 연장, 또는 변형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다만 바로크가 지녔던 충만한 생동감이나 장중한 위압감 따 위가 로코코에서는 세련미나 화려한 유희적 정조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바로크가 남성적, 의지적임에 반하여 로코코는 여성적, 감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로코코 건축의 최초의 작품 은 로베르 드 코트의 베르사이유 궁전 예배당인데 메소니에, 보프랑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어서 오베르, 가브리엘 부자와 크루토느 등이 활약하였고 보프랑이 만든 오테르 드 스비즈 의 타원형 살롱, 가브리엘의 퐁텐블로 궁의 회의실이나 베르사이유 귱전의 여러 홀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은 당시의취미를 잘 전해주고 있다. 로코코 회화는 와토의 <시테르 섬 으로의 탈출>(1717)에서 비롯된다. 그는 색과 선이 서로 융합되고 서로 연관되는 섬세·우 아한 작품을 보이면서 품위있는 궁정 남녀의 유희도 등의 걸작을 남겼다. 1730∼5년부터 로코코의 또 다른 국면이 시작된다. 훗날 회화적 장르라 불리는 이때의 특징은 비대칭형적인 장식의 사용이다. 이것은 피노 (Nicolas Pineau)가 실내 장식에서, 그리고 메소니에(Juste-Aurele Meissonnier)가 은 공예 에서 처음 시도했으며, 그후 조각가이자 보석 세공인인 몽돈(Jean Mondon)과 조각가인 퀴 빌리에(Jean Francois de Cuvillies)가 그 뒤를 이었다. 한편 로코코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잇는 대표적인 화가들로는 와토(Watteau)와 부셰(Boucher)가 있다. 프랑스에서의 로코코의 퇴조는 신고전주의의 부활에 선행되어 일어났다. 18세기 중반, 코겡(Charles-Nicolas Cochin)과 블롱댕(Jacques-Francois Blondin)은 `회화의 장르'의 극단적인 사치에서 돌아서 서 고전적 풍습의 모방이 아닌 이전 세기의 `좋은 취향'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였다. 피노 의 죽음으로 `회화적 장르'는 종말을 고했으나. 로코코는 설계가 가브리엘(Ange-Jacques Gabriel), 세공인 베르벨크트(Jacques Verberckt), 조각가 루소(Antoine Rousseau)의 영향 아래 좀더 보수적인 형태가 되면서 루이 15세의 통치 말기 까지 급격한 단절없이 계속되었 다. 로코코는 고대풍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새로운 취향의 고전주의가 출현함으로써 종말 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마치매 프랑스 혁명과 함께 새로운 시민 계급과 청교도적인 분위기 가 대두되면서 전 세대의 예술과 도덕의 경박성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로코코는 파리에서 부터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스페인·이탈리아 북부로 전파되어 각 나라의 특성이 가미 되고, 지역에 따라 많은 변형이 생겨나게 된다. 영구에서는 가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로코 코가 거의 유행되지 않았지만, 독일에서는 1720년 경부터 약 50년간 로코코 양식이 건축계 를 지배하였다. 다만 독일의 로코코 양식에는 바로크적인 장중미가 많이 남아있어 그 결과 장중한 건축과 경쾌하고 화려한 내부 장식의 색다른 대조를 보였다.   룰레트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 Lautrec,1864~1901)

프랑스의 화가. 알비에서 태어났다. 1882년부터 파리에서 코르몽의 지도를 받으면서 개성있는 소묘 화가로서 독자적인 자질을 키워나갔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13년 동안 그 곳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작 품을 만들었다.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 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알코올중독으로 정신 이상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37세로 생애를 마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물랭 루즈〉 〈창부의 머리〉 등이있다.

 

루벤스 (Peter Paul Rubens,1577~1640)

플랑드르(벨기에)의 화가. 독일 베스트팔렌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이탈리아에 유학을가 고대 및 르네상스의 미술을 연구하였고,귀국하여 1609년 플 랑드르 총독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외교 사절로서 여러 나라에서 일하면서 각국의 왕과 귀족들의 존경과 사랑을받았던 그는, 그들의 요청으로 많은 그림을그렸다. 특히, 프랑스 뤽상부르 궁전의 21면으로 이루어진 연작 벽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는 대표작으로 바로크 회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폰 레르마 공의 기마상〉 역시 이 때 제작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밝게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웅대한구도가 어울려 생기가 넘친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일레폰스의 제단화〉 〈최후의 심판〉 등이 있다.

 

루소 Henri Rousseau (1844 - 1824 / 프랑스)

1844년 서프랑스의 라발에서 출생한 화가. 처음에는 변호사 사무소의 서기로 일하다가 1865년부터 파리의 세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여가 를 틈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세관으로서 20녀간 지내면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 에 "르 두아니에"로 애칭된다. 1885년 루브르 미술관에 나가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였 다. 그리고 그해에는 또 샹-젤리제의 살롱에 처음으로 작품2점을 출품하였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전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퇴직했다. 앵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하 여 그후 1910년까지 거의 매년 여기에 출품하였다. 이때 그는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친교를 맺었었다. 동화적인 세계를 단순 소박하게 그리는 독특한 화풍이 처음에는 때때로 주위 사 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1891년경부터 즐겨 이국적인 주제를 다루어 '전쟁', '잠자는 집시', '파리 반프 세관'등을 제작하였다. 1905년 살롱 도톤에 첫 출품하였고 이어서 1906년 에는 들로네, 블라맹크, 피카소 및 시인이며 비평가인 라폴리네르 등과 사귀었다. 1907년에는 독일의 비평가 우데가 그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의 존재가 인저되 어갔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상기한 작품 외에 '꿈', '시인을 고무하는 뮈즈', '제니에 영감의 마차', '풍경을 배치한 자화상', '뱀의 마술사' 등을 들 수 있다. 1910년 사망하였다.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

루오는 다른 야수주의 작가들과는 다르게 종교적인 주제로 깊이감을 형성하고 있다. 흔히 20c의 최대의 혹은 유일한 종교 화가라고 일컫는다. 거친 질감과 두꺼운 윤곽선에서 느껴지 는 깊은 맛은 스테인드 글라스의 조형성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오는 프랑스의 작가 및 판화가이다. 초기 작품은 파리와 근교의 빈민가의 광경을 그린 수채화가 주종을 이룬다. 제1차 대전 발 발이전 그의 수채화는 추락한 인간성 앞에서 그가 느끼는 절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광대, 판 사, 창녀등의 인물을 그의 소재로 다룸으로써 그는 이들은 비참함, 사회적 부당함, 정신적 좌절의 원형적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1905년 야수주의를 알게 되었으나 그의 주제에 깔린 종교적 특성은 그대로 보전된다. 루오 의 화풍은 도미에를 연상시킨다. 루오는 명암, 뉘앙스, 모사등을 거부하였다. 두껍게 채색한 물감이 발하는 강력한 빛, 두꺼운 검은 테두리로 둘러쳐져 있는 인물등 그의 그림은 고딕 스테인드 글라스나 비잔틴의 모자이 크를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에는 자주 종교적 모티브와 어둡고도 두터운 표현적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루 오가 그리는 그리스도는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현실세계에서 의 인간의 죄와 악을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의 충동이다. 루오는 이런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을 표현했다. 1933년에 그린 [성스러운 얼굴] 에는 그의 이런 예술관이 드러나고 있다. 루오의 그리스도 초상화에는 진실을 갈구하는 인간의 고뇌가 빚어져 있다. 그것은 분노와 절망을 감춘 고독 의 모습이다. 그의 색채는 깊고 탁하며, 힘차고 단순화된 선에 의한 형태가 두터운 색 층속에서부터 배어 져 나온다. 검은 윤곽선에 의한 색면들은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볼 수 있는 구획성을 상기시키며 그의 그림을 중세의 종교화와 같은 무게감을 갖게 한다. 루오는 스스로를 현대사회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인물로 실제로 그의 삶은 대성당을 짓던 중세기에 속하는 것이었다. 주요 작품 : 늙은 왕 등 룰레트 도자기에 문양을 놓는 기법의 하나. 나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무명실을 잣는 작은 물레와 비슷한 도구. 돌아가는 작은 바퀴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유래. 이것으로 도자기에 문양을 새긴다. 손잡이에 달려있는 굴대에 룰레트를 걸어 놓았으므로 쉽게 돌아갈 수 있고, 축축한 점토에 반복적인 압인문을 새기는 데 사용한다

 

르네상스 미술(Renaissance Art)

14세기 이탈이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유럽을 풍미하며 정점에 이르렀던 미술 경향. 르네상 스의 정확한 적용 범위는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재탄생'을 뜻하 는 르네상스라는 말의 어원을 역사적으로 보면 고전 학문의 부활을 기술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한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르네상스라는 단어의 의미가 문학 및 예술 운동에서 특 정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 통용된 것은 18세기 부터이다. 미슐레가 자신이 쓴 프랑 스 역사의 한절에 `르네상스'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1855), 마침내 르네상스는 특정한 시대 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발견', `인간의 발견' 등 르네상스라 는 말 자체에 대한 광범위한 정의는 시대적 한계를 정의하기 어렵게 했고, 따라서 그에 대 해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좀더 정확을 기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술에서 의식적으로 고 전적인 모범을 모방하려 하거나, 고전적 가치 기준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으면 `르네상 스'라 기술하기로 한다. 이같은 해석은 14세기 시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등이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리나시타(rinascita)'라는 말과도 부합된다. 그것은 고전 라틴 양식의 모방 과 모든 고전적인 유뮬에 대한 무한한 찬양을 의미한다. 일군의 이탈리아 피렌체의 예술가 들이 고전 예술을 부활시키려는 야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건축; 르네상스의 새로운 열광이 가져온 가장 본격적인 결과는 피렌체의 건축가 브루넬레스 키가 보여준 새로운 유형의 건물이다. 그는 고딕 양식의 세부 조항들을 떨쳐버리고 자신이 로마적이라고 생각한 건축물들을 본따 지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판테온 가구 기술을 채 용하여 돔을 설계하고 조화있는 볼륨의 공간에 세우는데 성공했다. 고딕 건축의 수직적 상 승성을 배제하고 조화를 이루면서도 장중한 공간을 살린 르네상스 건축은 여기서부터 출발 했다. 초기 르네상스 건축가들을 괴롭힌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하나가 교회문제였다. 브루넬레스 키는 초기 기독교 건물에 사용했던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돌아갔으나, 알베르티는 아주 새로 운 시도를 했다. 그는 세로로된 평면도를 정사각형과 원형으로 발전시키려 시도했다. 원은 플라톤 학파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로 간주했으며, 신의 완벽함을 반영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로 생각한 것이다. 프란체스코 디 죠르죠(Fancesco Di Giorgio)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쥴리아노 다상갈로(Giuliano da Sangallo) 같은 사람들이 이같은 형태의 교회 건축 설계에 몰두했다.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르네상스 건축을 대표하는 사람은 브라만테(Bramante)로 그가 설게 한 건물들은 후에 `고전'으로 간주되었다. 브라만테의 설계의 웅장함은 그 양식과 규모에 있 어 로마 제국의 장엄함에 필적하고자 하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야심을 잘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캐피톨과 꼭대기의 둥근 지붕을 변형시켜, 동시에 그는 의도적으로 또 심지어 는 변덕스럽게 고전적인 규범의 변형을 시도했다. 16세기 후반에 이와같은 놀라운 효과를 내기 위해 고의로 정통적인 고전주의의 수법을 깨는 건축가들을 분리시켜 매너리즘이라는 항목에 넣기도 한다.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규칙을 엄격히 고수한 사람들 중에 사미켈레와 비뇰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조화롭고 건실하게 르네상스 양식을 준수한 건축은 팔라디오(Palladio)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리고 그의 건물과 저서에게는 오랫동안 고전적인 권위가 부여되었다. 유럽 북부 지방으로 옛 양식이 침투하게 된 것은 비교적 늦게 그것도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옛 양식은 맨처음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곳인 왕실과 국제적인 상업 중심지에서부터 수 용되기 시작하여 책이나 예술 작품을 통해 전파되었고, 16세기 중기에는 북유럽 전역에서 고딕 양식에 대치되기 시작했다. 조각;고전적 모범과 규칙에 의존하는 르네상스의 건축은 특성을 기술하기가 용이한 반면, 르네상스의 조각을 정의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바자리(Vassari)는 고전적인 석관에서 모티 브를 빌어온 니콜라 피자노(Nichola Pisano)에게서 르네상스 조각이 시작됐다고 보았다. 그 러나 고딕 조각가들도 역시 고전적 조상에게서 모티브를 빌어왔으며, 또 피자노의 예술은 우리가 원시 르네상스로 분류하는 그가 살던 시대의 북부 지방예술과도 공통점이 많다. 조 각에 르네상스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 것은 15세기 초, 도나텔로에 가서이다. 도나텔로는 고 전적인 모티브를 모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대 작가들이 격찬했던 고전 조각의 정신 을 부활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한편, 로렌초 데 메디치 같은 후원자가 보석과 소형 청동상들 같은 고전적인 조각을 수집했던 것이 고전적인 소상과 부조에 대한 수요를 낳게 했고, 그 수요는 폴라이우올로(Pollaiuolo), 베르톨로(Bertoldo), 안티코(Antico), 모데르노 (Moderno), 리코(Ricco) 같은 장인들에 의해 충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가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면서 젊어서부터 고전 작품과 경쟁의식을 느끼며 규모가 큰 대리석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의 하나인 <잠자는 큐피트>상은 실제로 골동품으로 팔리 기까지 했다 한다. <바쿠스>상에서는 그가 고전적인 조각 정신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관찰 할 수 있다. 또 <죽어가는 노예>같은 그의 후기작에서는 고전적 풍의 최고작들과 겨루려는 그의 야심과, 또 인체 해부학이나 얼굴 표정에서는 그것들을 능가하려는 야심을 느낄 수 있 다. 그러나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고전 조각의 이상을 외면했으며, 르네상스에서조차 멀어져 매너리즘적 경향으로 흐른다. 한편 르네상스의 조각은 토리지아노(Torrigiano), 첼리니(Cellini)같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여행으로 북유럽까지 전파되었다. 회화; 르네상스의 건축 양식은 고전적 원형을 참조함으로써 정의내릴 수 있고, 르네상스의 조각은 적어도 고대 유물들과 비교해봄으로써 특징을 말할 수 있으나, 르네상스의 회화를 구성한 것이 무엇이었느지를 규정하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다. 그 시대의 회화는 고전 형 식의 도움 없이독창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옛날 대가들의 작품은 문헌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으므로 15세기 르네상스의 대중들은 고전 저자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에 충실하고, 완벽한 형태를 추구한 그림들을 직접 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회화가 시작된 것 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이탈리아 회화가 처음으로 비잔틴 전통의 종교적 상징에서 탈피 하면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관례이다. 이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 화가가 지오토이다. 그를 통 해 이미 사멸해버렸던 회화 예술이 다시 소생하게 된다. 1550년 바자리는 피렌체 지방에서 자연주의적 전통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오토를 선두로 하는 새로운 회호의 발 달단계를 셋으로 보았다. 우선 대략 14세기에 해당되는 첫 번째 단꼐는 유럽에서 고딕 건축과 조각이 성하던 시기와 일치하며, 이탈리아의 맥락이 아닌 유럽 차원에서 보면 국제적인 양식이었던 고딕이 진일보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회화의 탈월성은 바자리가 말한 `두번째 양식'이 1425년경 마사치오에 의해 도입 되며 입증되기 시작했다. 이때는 도나텔로의 최오의 르네상스 조각과 더불어 브루넬레스키 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시작된 때와 일치한다. 마사치오가 미술사에서 특별한 위 치를 점하게 된 것은 그가 브루넬레스케의 수학적 천재성이 낳은 과학적 원근법을 회화에서 적용시킨데 기인한다. 르네상스 회화에서 이 발명이 갖는 중요성은 대단히 크다. 이로써 회 화는 합리적인 작업이 되었고, 과학적 정확성을 얻기 위해서는 입체적 형태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요구했다. 화가들은 정확한 신체 구조와 비례에 대해 알기 위해 해부학을 연구하게 되고 나체모델을 통해 체계적인 데생을 하게 되었다. 회화에 조각과 같은 균형성을 부여하 려는 노력은 고전적 조각과 릴리프에 가까워지려는 경향을 낳았다. 15세기 후반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고전 세계의 재창조 작업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고전적 주제의 그림이 많이 나왔으며, 그 한 예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한편 이와 병행하여 자연의 시정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져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회화에 풍경 을 배경으로 그려넣어 화가가 재현한 장면의 분위기를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 화가로 지오반니(Giovanni)를 들 수 있으며 그의 작품으로 인하여 베네치아의 회화 가 색채 면에서 우세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바자리가 `세번째 양식'이라 하고 우리에게는 르네상스 성숙기로 알려진 시대의 특징은 정확하고 적절한 표현의 숙달과 고전적인 아름다 움의 재발견에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케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위대한 대가들 의 시대인 이때의 예술에서 후세인들은 지오토 이래 호가들이 추구해온 모든 이상이 실현된 것을 보았다. 바자리의 지적처럼 이 시대에 도달한 완벽한 기법의 숙달로 회화에서는 이전 시대의 부자연스러움과는 대조되는 편하고 우아한 조화를 낳게 되었다. 거친 윤곽은 레오나 르도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양에 의해 사라지고, 페루치노의 엄격한 대칭적 수법은 라파엘 로의 균형잡힌 피라밋 형의 구도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다. 화가들은 이제 더 이상 고전을 모범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신성한 창조자에 준한다고 보았다. 합리적 도안과 안정된 윤곽의 터스커니 식 전통은 미켈란젤로와 브론지노(Bronzino), 살비아티(Salviati), 바자리 같 은 추종자들에게서 정점을 이룬다. 그러나 이들 피렌체의 예술 회원들은 복잡한 자세와 남 성적 나신의 숙련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르네상스의 조화를 파괴시키고 매너리즘으로 흐 르게 된다. 색깔의 완벽은 베네치아 인들에게 - 특히 미켈란젤로와 명성을 겨루었던 티치아 노에게 그 공이 돌아간다. 그와 함꼐 같은 시대의 코렛지오(Corregio)와 베로네제(Veronese) 는 바로크의 전조가 된 색채의 현란함고 빛의 효과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한편 북부의 젊 은 화가들은 르네상스 화가라기보다 매너리스트로 보이는 추세이다. 알프스 북부의 회화는 르네상스와는 별개로 발달했으나, 드물지만 소수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르네상스의 이상이 수용되기도 했다. 그 대표가 뒤러(Durer)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 다시 태어난' 예술을 독일 토양에 이식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고 이탈리아 대가 들의 `비법'인 수학적 원근법과 비례의 법칙을 알고자 고전적인 미의 신비를 탐구하는 저술 과 작품제작을 하는 데에 전 생애를 바쳤다. 네덜란드에서는 고딕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르네상스의 수용이 늦어졌다. 한편 영국과 프랑 스의 엄격한 궁정풍의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은 피렌체에서 처음 발생한 르네상스와는 상당 히 다른 양상이어서, 오늘날의 역사가들이 르네상스 화가로 분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천년 이상 종교 지배 아래에서 내세의 구원과 현세의 속죄만을 빌던 유럽인들은 14세기를 보내면서 새로운 자각에 눈뜨게 된다. 그것은 초월자 신이 아닌 인간 자신과 실제 주변에 존재하는 자연 세계였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던 유럽인들은 로마의 몰락에 의해 소멸된 고대 문명이 다시금 예전의 위대한 그리스 때처럼 되살아나기를 원했으며, '중세'라는 정신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였 다. 이들은 고대 문헌의 재발견과 실증적 연구를 통해 고대사회에 존재했던 인간 중심 사상의 유산을 발견하였다. 또한 때마침 일기 시작한 '인문주의'에 고무되어 천년 동안이나 계속되 었던 신 중심의 '암흑시대'를 마감하고자 했다. 물론 중세에도 고전의 부분적인 계승은 간헐 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그리스, 로마 예술의 전면적 부활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특유의 현상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미술이 단순히 고대 예술의 모방은 아니다. 이 시기는 순수한 시각적 미와 현실 세계에 대한 가치 평가가 재 시도되는 시대였으며, 인 간과 자연에 대한 인본주의적 자각이 중심 사상이었다. 전지전능한 신의 위력에 눌려 있던 인간이 다시금 모든 사물의 중심이자 척도 가 되었으며, 신을 더 이상 억압과 군림의 상징 이 아닌 인간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위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 다.

 

르네상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생'을 의미하는 말로써 이탈리아어의 '리나시타(Rinasita)' 로 부터 파생된 명칭이다. 르네상스는 단지 예술 분야의 고대 문화의 부흥뿐만 아니라 문화 사 상 전반에 이르는 대변혁이었다. 초기 르네상스 14세기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상업과 무역의 발달로 풍족한 생활과 자유로운 시민사회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이 중 피렌체는 그 발전상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 문에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아낌없는 후원과 관심을 보여줄 수 있었다. 특히 피렌체 최대 의 부호이자 문예, 예술 분야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예술가들을 지원한 메디치家에 의해 피 렌체는 '문예부흥'이라는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된다. 이 시기의 특징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영광을 창조한 인간 정신의 힘을 재생시키고자 하는 데 있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은 실증주의 시대인 로마 때와 같이 실존 인물의 초상화 제작에서 볼 수 있다. 중세 시대의 성모자(聖母子), 예수, 성인(聖人)을 그린 종교화가 아닌 왕과 교황, 귀족 들과 부유한 시민이 미술가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그리도록 주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 은 바로 신 중심이 아닌 살아 있는 인간 중심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그 이전까지 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리스 신화 속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작품 안에 등장시킴으로서 희랍 문예부흥을 실천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그리스 신들이 작품의 주제가 된 경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도 중세의 기독교는 계속 유럽인 정신 속에 살아 있는 유일한 종교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많은 수의 기독교 주제를 다룬 작품이 계속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양식에 있어서는 분명 중세때와는 달라졌다. 원근법, 단축법 등의 과학적 기법들이 새로이 발견되면서 표현은 점점 사실적으로 되어갔다. 이렇게 해서 15세기 피렌체에서 확립된 조화와 질서의 이상과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이후 서 유럽 르네상스 열풍의 근본적 지침이 된다. 전성기 르네상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친 30여 년 간의 짧은 시기를 흔히 '위 대한 대가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3대거장 이 활동했던시기이며, 지오르지오네, 티치아노 등의 베네치아파가 활약한 때이기도 하기 때 문이다. 16세기전반은 사회, 종교, 경제적으로 무수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였다. 각 나라마다의 식민지 확보 경쟁과 종교의 변혁, 거기에 따르는 사회의 불안정은 시민사상 의변화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속에서 고대 희랍의 위대한 업적과 비견 될만한 서양미술의 완성이 이룩된 것이다. 실제로 전성기 르네상스의 대가들은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각자의개성을 살리면서 초기 르네상스부터 추구되어 오던 '르네상스'의 과제를 훌륭히 이행해 내었다. 이러한 예술가로서의 확고한 자각과 업적은 거기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를 얻게 하였다. 즉, 이전까지 장인(匠人)의 신분에서 머물러 있던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이 각자 나름의 실력에 맞는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보통사람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보는 이를 감동시키고 역사에 남을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 가'라는 개념이 비로서 생기게 되었다. 이제 위대한 예술가는 교황과 황제등 최고 권력자들로부터까지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주 무대는 이탈리아 중심의 도시 로마와 동방과 유럽 여러나라를 잇는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척한 베네치아였다. 또한 로마에서는 교황청의 성당 주문으로 이전보다 훨씬 대규모의 작품이 제작된다. 매너리즘(말기 르네상스) 전성기 르네상스의 뒤를 잇는 말기 르네상스를 지칭하는 용어로 '매너리즘(Manerrism)' 이란 말이 사용된다.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의 '마니에라(maniera)'에서 유래한 것으로 '양식' , '기법'을 뜻한다. 15세기 전반기의 대가들에 의해 완성된 르네상스 기법을 작품 안에 깃들어 있어야할 '창조성', '영혼성'은 배제시킨 채, 외면적으로만 흉내낸 모방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의미는 금세기초에 이르러 '고딕'양식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의 독특한 양식을 구분지어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시기의 기법상 특징은 추상적 볼륨으로 처리된 길쭉한 인체 표현, 개인의 환상에 치우친 화면 분위기 등,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적 균형과 이상적 조화가 깨어지고 다소 과장되고 비합리적인 표현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이미 전대의 천재들에 의해서 완성된 자연, 사실주의 적 기법이 더 이상 이 시기의 작가들에게 '르네상스'적인 태도에 머무르게 하지 않게 하였 던 것이다. 대신 그들은 반 고전주의적인 자세로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휘해 새로운 예 술시각을 찾고자 하였다. 북유럽 르네상스 15세기 중반 이탈리아 화가들과 북유럽 화가들은 동시에, 그러나 다른 방 식으로 국제 양식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양상을 추구해 나아갔다.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 스시기에 비견하는 15세기 북유럽 미술은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일부 지역)회 화일 것이다. 여기서 반아이크 형제는 유화를 발명해 중세 프레스코화 기법에 서는 볼 수 없었던 섬세하 고 명확한 사실성을 화폭에 담아 내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원근법의 발명과 견줄 만한 사 건으로서 서양 회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한 15세기 북유럽의 초상화 제작 도 중세와는 다른 미술계의 분위기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플랑드르 회화는 아직 고딕 양식의 회화 기법을 고수하면서 화면 안에서의 세세한 부분에 현실감을 주는 특징을 보여, 보수성과 현실성의 공존이라는 평가를 받고, 이 때문에 고딕 말기 혹은 북부 르네상스로 분리되어 불리게 된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 가로 반 아 이크 형제, 플레말레 화가로 불리는 로베르 캉팡, 히에로니무스 봇슈 등이 있다. 한편 이러한 회화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건축과 조각 분야에서는 고딕 양식이 16세기가 다 되도록 명맥을 유지한다. 이는 고딕 양식이 변함없이 종교적 지원을 받으며 중심적 예술 형 식으로 그들 사회에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세기 이후 북유럽 미술가들은 플랑드르 화가들을 존경하면서 그들의 후기 고딕 양식을 답 습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를 거쳐 16세기에 이르자 학문과 기행을 목적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한 몇몇 예 술가들에 의해 서서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수준 높은 양식들에 눈을 뜨게 되고, 북유럽은 서서히 그러나 뚜렷하게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후기 고딕 양식에 르네상스 기법을 하나 둘씩 접목시킴으로서, 안정적이고 북유럽 고유의 특색을 무너뜨리지 않는 상태에서 두 양식의 혼합된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천년간이나 그들의 세계를 지배했던 중세의 문화는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 게 된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알브레히트뒤러, 그뤼네발트, 홀바인, 브뤼겔 등을 꼽을 수 있다.

 

르누아르 (Auguste Renoir,1841~1919)

프랑스의 화가. 리모주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며 색채에 대하여 배운 것이, 나중에 그림 을 그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모네·세잔 등을 알게 되고, 코모·들라크루아 등의 영향을 받아 밝은 그림을 그렸는데,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눈부시게 빛나는 색조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881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부터는 고전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데, 이 때의 작품으로 〈목욕하는 여인들〉 등이 있다. 그 뒤로는 인상파에서 벗어나 풍부한 색채 표현을 되찾았고, 원색 대비에 의한 독자적 작풍 을 확립하여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화가가 되었다. 말년에는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붓을 매고 그림을 그렸다. 또한, 조각에도 흥미를 가져 〈모자〉와 같은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나부〉 〈물랭 드 라 갈레트〉〈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 등 이 있다.

 

르느아르 Auguste Renoir (1841-1919/프랑스)

1841년 양질의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중부 프랑스의 리모즈에서 출생한 화가. 4세때 일 가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였으며 13세때 가계를 돕기 위해 도기 공장에 들어가 직인의 과정 을 익히면서 일하였다. 그가 담당한 일은 도기의 윗 그림 그리기였다. 이 작업이 결국 평생 화가로서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20세 때인 1861년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이 아틀리에에서 그는 모네, 시슬레 등과 알게 되었으며 또 외광파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863년 글 레이르의 화실을 떠나 라투르와 함께 루브르에 다니며 옛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1863 년 글레이르의 화실을 떠나 라투르와 함께 루브르에 다니며 옛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하였 다. 1867년경의 작품에는 쿠르베 및 마네의 영향이 현저하게 엿보이고 있다.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제2회전 및 제3회전에도 출품하였다. 1879년 이후부터는 인 상파의 동료들로부터 점차 멀어져갔다. 1881년 봄에는 알제리로 여행하였으며 가을부터 이 듬해인 1882년에 걸쳐 베네치아, 로마, 남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한 뒤에는 또 다시 알제리에 서 그 해의 봄을 보냈다. 그리고 그 해의 제7회 인상파전에는 작품 25점을 출품하였다. 이탈 리아 여행의 결과로서 그가 시도한 고전적인 선의 추구가 1883년에는 뒤랑 - 뤼엘 화랑에 서 개인전을 개최하여 호평을 얻었다. 1890년대 말엽에 이르러서는 지병인 관절염이 점점 악화되어 손에 붓을 묶어 놓고 그릴 정도로 부자유스러운 몸이 되었다. 1903년 이후부터는 겨울을 남프랑스의 카뉴에서 보내고 여름은 부르고뉴의 에소화에서 보냈으며 파리에는 봄 또는 가을의 좋은 계절을 골라 단기간에만 체재하였다. 노쇠와 질병에도 불구하고 제작의욕 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래서 화경은 더욱 더 완숙해졌다. 그는 훌륭한 풍경이나 정물도 많이 그렸으나 특히 부녀 및 어린이, 나체의 콤포지션에 걸작을 많이 남기고 있다. 만년의 작품을 보면 색체가 미묘하게 융합하고 있어서 선묘적인 요소는 찾아 볼 수 없다. 더구나 대상의 대상의 파악법은 정확하여 생명이 약동하는 듯하다. 색체에 대한 르느와르의 감정은 항상 열렬핟였다. 더구난 거기에는 사람의 의표를 찌른다든가 또는 교묘한 꾸밈을 구사하는 의도가 조금도 없다. 그의 일관된 제작 태도와 마찬가지로 색체에 있어서도 그는 매우 단순 명료한 것을 애호하였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 즐겨 채용한 색깔은 선명한 녹색 및 순수한 청색에 의해 돋보이는 적색, 귤색, 황색 등이었다. 한편 66세 때에는 마이욜과 사귀면서 그 의 영향을 받아 조각도 만들었다. 처음에는 소녀의 목을 작은 원형 양각으로 만들다가 만년 에는 커다란 환조에도 손을 대었다. 젊은 조각가인 조수가 있었는데, 이사람은 르느와르가 주도하고 지시하는데 따라 작업하여 [비너스], [무릎 꿇은 사람] 등 청동상의 모델을 만들었 다. 1919년 12월 카뉴에서 상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목욕 하는 여인들], [피아노 앞의 앉은 소녀] 등을 비롯하여 [목욕하는 여자와 강아지], [관객석], [우산], [테라스에서], [나부] 등이다.

 

르푸스와르

회화 기법상의 용어. 회화의 전경에 있는 어두운 장소. 주된 정경을 강조하거나 후퇴하는 듯 이 보이게 하기 위해 또는 깊숙한 인상을 주기 위해, 회화의 전경에 있는 인물이나 물체를 강하고 두드러져 보이게 그리는 수법.

 

리노컷 Linocut (영)

판화의 기법. 20세기에 와서 개발된 것으로 제작 방법은 목판화와 같으나 나무판 대신 리 놀륨 판을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 목판화와 목각의 중간쯤 되는 것으로 두 가지 특성을 조금씩 갖고 있는 한편 고유의 특성 도 갖고 있다. 재질이 무르고 연하며, 표면이 고르므로 조각이 쉽고 다양한 질감 표현이 가 능한 이점이 있다. 비용도 저렴한 편이어서 대담하고 장식적인 대작의 색판화용으로 적합하다. 미술 교육용 소 재로 많이 사용되므로 자칫 소홀히 취급될 수 있으나 마티스를 위시한 창조적인 예술가들의 다양한 노력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리노컷(linocut)

판화의 기법. 20세기에 와서 개발된 것으로 제작 방법은 목판화와 같으나 나무판 대신 리놀 륨 판을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 목판화와 목각의 중간쯤 되는 것으로 두가지 특성을 조금씩 갖고 있는 한편 고유의 특성도 갖고 있다. 재질이 무르고 연하며, 표면이 고르므로 조각이 쉽고 다양한 질감 표현이 가능한 이점이 있다. 비용도 저렴한 편이어서 대담하고 장식적인 대작의 색판화용으로 적합하다. 미술 교육용 소재로 많이 사용되므로 자칫 소홀히 취급될 수 있으나 마티스를 위시한 창조적인 예술가들의 다양한 노력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리베르만2 (Max Liebermann,1847~1935)

독일의 화가.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바이마르 미술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였고, 1873년에는바르비종에서 지내며 밀레의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어두운 색조의 사실주의 작품을 그렸으나 밝은 색조로 바뀌기 시작하여 〈어망을 깁는 여자들〉 〈염소를 데리고 있는 여자〉등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그는 베를린파 화가였으며,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자연주의에서인상주의로 넘어가는 세계적 조류를 받아들인 독일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이다. 풍속화적 작품 외에 초상화에도 뛰어났고, 에칭·석판화 및 동판화에도 재능을 발휘하였다. ‘베를린 분리파’를 만들어 회장이 된 데 이어 프러시아 아카데미 회장이 되었으나, 나치 정권이 등장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거위털을 뜯는 여자들〉이 있다.

 

리빙 스컬프쳐(living sculpture)

미술가나 물리적인 오브제에 의한 제작을 포기하거나 미술가 자신을 미술품으로 제시하는 최근의 미술경향을 일컫는 용어. 예를 들면 1961년에 이탈리아 미술가 피에로 만조니는 누 드 모델의 몸에다 사인을하여 동료들에게 그것은 바로 미술품임을 선언하였다. 그후 만조니 의 작업 방향은 자신의 신체(신체의 유기적 과정과 분비물)를 예술과 동일시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플룩서스 그룹의 영향을 받은 `부적합의 페스티벌(Festival of Misfins)' 이 런던 에서 열렸을 때 (1962년), 벤 바우티어는 자신을 15일 동안 갤러리의 창가에 전시하여 생체 조각의 사례를 보였다. 1969년 스톡홀름에서는 만초니의 뒤를 이은 피 린드가 화랑 안에 주 춧돌을 갖다 놓았고 관객들은 자신들이 조각 작품이 된다는 생각없이 무심코 그 위에 앉았 다.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출신 미술가 재니스 쿠넬리스는 선인장과 앵무새를 예 술작품으로 제시했으며 자기 자신을 다양한 배열로 화랑에서 전시시키며 `삶의 상황들(Life situation)' 이라고 묘사했다. 앤 제임스는 1972년 '거꾸로 된 조각(Sculpture in reverse)' 이 라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찾아온 관객 자신들이 조각 전시회에서 관 객들로 하여금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진짜가 아닌지, 거기에 대한 판단이 불확실하 도록 움직이지 않는 실재의 인간을 등장시켰는데 이제는 진부한 방법이 되었다.  

 

리터럴 아트(Literal Art)

리터럴 아트는 미국의 평론가 마이클 프리드가 미니멀 아트에 내재한 `연극성(theatricality)' 과 관련하여 그것의 비 예술성 혹은 그것이 모더니즘 예술의 과제와 어긋남을 비판하면서 다시 이름붙인 용어이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리터럴 아트는 모더니즘 회화와 조각과의 관계 에 의거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얻고자 한다. 따라서 그 회화적 열망은, 거의 모든 회화가 갖 고 있는 상관적 성격과 대응하면서 회화의 일반적 성격인 그려진 환영에서 벗어나려는 것으 로 나타난다. 이는 곧 '변형 캔버스' 등의 형태로 완성되기도 했다. 즉 리터럴 아트가 다루는 대상은 그 자체의 속성 그대로, 자립적인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미 니멀 아트라는 말이, 작품의 대상성을 은폐하면서도 최소한의 표현을 시도하는 예술을 의미 하는 것과는 달리, 리터럴 아트는 작품의 대상성 자체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관람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대상성의 체험은, 어떠한 상황 내에서의 대상에 대한 체험이다. 따라서 리터럴리스트의 작품을 대하는 실제의 상황에 관심이 있으므로 연극적인 요소가 있 다. 마이클 프리드는 그런 연극적인 요소가 있다. 마이클 프리드는 그런 연극적인 것이 미술 의 자립성을 꾀하며, 따라서 리터럴 아트는 연극성을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 존립 이 결성될 것이라고 하였다.